메시지

평화의 왕 예수님 (누가복음 19:28-4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4. 15. 02:48

평화의 왕 예수님

 

누가복음 19:28-48

 

제가 중학생 때인가 읽었던 한국 근대 단편 소설 하나가 있습니다. 오래 되어서 소설의 작가도,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들 둘을 가진 가난한 시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시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고, 큰 아들은 공부를 잘 했는지 서울에 있는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시골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큰아들 집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주려고 아들이 어릴 적에 좋아했던 떡을 정성스럽게 만듭니다. 함께 살고 있던 시골 손자들은 떡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할머니는 손도 못 대게 합니다. 보자기에 싼 무거운 떡을 힘겹게 이고 먼 길을 여행하여, 할머니는 마침내 큰아들 집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를 맞이하는 며느리와 서울 손주들의 표정이 싸늘합니다. 얼굴에 싫은 표정이 역력합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아들조차 오랜만에 오신 어머니를 그리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정성껏 준비한 떡을 며느리에게 건넵니다. 하지만 아무도 할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떡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자신을 귀찮아하는 서울 며느리가 눈치가 보였는지, 할머니는 새벽에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식구들이 깨기 전에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대문 밖 쓰레기통 속에 낮 익은 것이 보입니다. 바로 할머니가 큰아들을 주려고 정성껏 준비해온 온 떡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너무 마음이 쓰리고 아파서 제가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 또한 우리가 이렇게 뼈저리게 아픈 사연으로 기억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신 가장 좋은 선물을 사람들이 거절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싫어하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신 선물은 무엇이며, 사람들은 왜 그 선물을 싫어하고 버렸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은 평화입니다. 성경에는 평안또는 평강으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대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사람들도 평화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평화는 사실상 전쟁입니다. 싸워서 이김으로 얻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내가 왕이 되는 평화이며, 많은 적들을 만드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불화하는 평화이며, 이웃과 원수가 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평화가 아니며,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과 멸망입니다.

 

오늘 말씀의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31-3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모두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평화의 왕으로 즉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평화의 왕이십니다. 곧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성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겸손한 순종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 둘을 건너편 마을에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하라.” 제자들이 가서 보니 과연 거기에 나귀 새끼가 있었고, 또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과연 주인들이 나타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말하였습니다. 이는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살짝드러내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아주 자세하게 꿰뚫고 계시며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시는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왕께서 자신의 성, 평화의 도시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크고 높은 백마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에 대해서 선지자 스가랴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9). 예수님은 온 세상을 그 권세 아래 두신 참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십니다. 이 왕께서 그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시자 제자들이 길에 겉옷을 펴서 깔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뻐하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에 대해 37절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아왔던 제자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시고 친히 왕위에 오르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9:11b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제자들의 이런 생각과 기대는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시달려왔으며, 또 종교지도자들마저 부패하여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많은 괴로움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또 사람들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다윗 같은 왕이 되어주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벌써 왕이 되신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으로 영접하며 기뻐함은 타당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2:14절에서도 이 땅에 왕으로 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말씀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여기서 평화에 관한 일은 영어 성경에는 주로 “what would bring you peace,” 또는 “the way to peac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것또는 평화에 이르는 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평화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부터 숨기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면서 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들이 가장 원하고도 원하는 것, 꿈에 그리면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늘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으며 기도했던 것 바로 그것이 지금 그들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미 그들 눈 앞에서 와 있고 이루어진 이 하나님의 선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선물을 싫어하고, 멸시했습니다. 이는 시골 어머니가 준비하신 떡처럼,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평화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화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언제 마음의 평강을 느낄까요? 사전적인 의미로 평화(peace)”문제가 없는 상태 (freedom from troubles)”라고 정의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평화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없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저축하고, 장래를 위해 보험을 들기도 하며,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운동도 합니다. 또 국가는 이웃 나라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와 무기로 무장을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생각해보면 문제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가 참 평화를 맛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런 세상의 평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참된 평화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 (peace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삶은 일생 쫓기면서 어둠 속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범죄자와 같습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의 영혼 아주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 우리의 존재 자체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두려워 숨은 것입니다 (창세기 3:10). 이 두려움은 우리가 아무리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만든다고 해도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악화되어서 차라리 그냥 다른 문제들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나을 지경입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하나님과의 평화 (peace with God)”를 통해서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평화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평화란 완전함(perfection)” 또는 흠이 없는 상태(freedom from defects)”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사람 사이에 평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의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바 평화를 가져오는 것 (what would bring you peace)” 또는 평화에 이르는 길 (the way to peace)”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에베소서 2: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He himself is our peace)”라고 말씀합니다. 또 골로새서 1:20-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순종으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9). 이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며, 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화목하십니다. 이는 우리 속에 우리가 믿음으로 붙든 바 평화의 주 되신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뻐하심이 샘솟듯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귀중한 선물을 멸시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미 지은 죄에 더 크고 악하고 무서운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시골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줄 떡을 만들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어릴 적 그렇게 좋아하던 떡을 받으면서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며느리에게 아들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서울 손주들의 입에 떡을 떼어 넣어주면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행복한 생각에 무거운 떡의 무게도 잊은 채 이를 머리에 지고 먼 길을 단숨에 달려 아들 집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차가운 새벽에 쓰레기 통에 버려진 떡 보자기를 보았을 때 얼마나 상심했을 것인지는 상상조차 되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그 떡을 지고 다시 시골로 돌아왔을지, 그리고 그 끔찍한 기억을 안고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았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평화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준비하셨습니다. 이 평화를 선물하시기 위해 심지어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평화를 선물하시면서 이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로 반갑게 맞아들이실 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이 평화를 거절하고 멸시했습니다. 이들이 장차 겪을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43,4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따라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조건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금방 없어지는 것이어서 차마 평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완전한 평화이며, 영원한 평화이며, 변하지 않는 평화이며,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 예수님께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각자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겸손하신 사랑 안에서 참으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