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대화하는 다윗
사무엘상 23:1-14
저는 육군 정보사령부라는 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 부대가 하는 일을 정보를 수집하고 또 수집한 정보를 필요한 곳에 제공하는 것입니다. 군 조직 내의 “신경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에서 그러하듯이, 신경 기관은 조직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며, 필요한 일을 함께 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경 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직 전체가 마비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정보가 때에 맞게 수집되고 보급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병력과 첨단 무기로 무장한 군대라도 앞을 못 보는 장님과 같으며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경이 끊어져 온 몸이 마비된 상태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갖고 있더라도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15절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며, 또 골로새서 2:19b는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생명과 성장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긴밀한 연락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다윗을 통해서 “머리 되신 하나님을 붙드는 삶”의 축복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다급한 정보를 전해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라는 마을을
쳐서 그 타작마당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일라는 여호수아가 유다 족속에게 준 성읍들 중 하나입니다 (여호수아 15:44). 그런데 다른 이스라엘 성읍들로부터 거리가 떨어져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또 블레셋 사람들의 지경에 가까이 있어서 늘 블레셋 약탈자들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추수 때가 되어 그일라 마을 사람들이 추수한 것을 타작하고 있는데 이것을 빼앗고자 블레셋 사람이 성을 쳐들어온 것 같습니다. 다윗 또한 유다 족속의 사람이었으니 그일라 사람들은 그의 가까운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다급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소식을 접한 다윗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바로 곤경에 빠진 내 형제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3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은 당시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시기를 받아서 쫓김을 당하는 도망자로 정처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도처에 사울 왕이 심어 놓은 스파이들이 있었으며, 누구든 다윗을 도와준 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사울의 칼에 죽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스트레스는 아마도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주로 깊은 굴 속에 숨어 지냈으며 그것조차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 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언제 왕의 군대에 잡혀서 죽을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늘 “겁 많은 토끼”처럼 위축되어 있었고, 작은 소리에도 숨을 죽이며 애를 태우는 두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도자인 다윗이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자!” 했을 때, 사람들은 아마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정작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곤경에 빠진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와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군대”인 반면, 다윗의 사람들은 육백 명 정도의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13절). 두려움에 익숙한 이들은 다윗을 따르기를 주저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은 다윗은 포기하는 대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다윗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도륙하고 오히려 그들의 가축을 탈취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말과는 차원이 너무나 다릅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다윗은 두려워 떠는 사람들의 말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불신의 말들이 주위에 난무하지만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재차 여쭈어 확인하고, 마음에 새기고,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이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에게 마치 그의 생명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철옹성”과 같습니다. 또 그를 대신하여 싸우는 “살아있는 권능”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말씀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는 머리 되신 하나님과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두려움 없이 싸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윗과는 대조가 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다윗이 그일라 성에 있다는 정보를 들은 사울은 무릎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이를 묻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시각은 매우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그 왕국의 백성인 그일라 성읍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노략을 당할 때, 이를 분노하고 군사를 일으켜 달려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달려가 그일라를 구한 다윗과는 너무나 크게 대조가 됩니다. 심지어 그는 다윗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충성된 신하 다윗을 위험한 적으로 보았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는데도, 그를 칭찬하고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를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데 있어서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만도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그는 손발이 마비된 중풍병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무엇이 이들 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사울의 “두려움”과 “불신”이며, 다윗의 “사랑”과 “믿음”입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불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처럼 들리지만 같은 마음 상태의 양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며, “사랑”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깊은 영혼 속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나 행태를 설명합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그는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미워하고, 쉽게 불신하였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매우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의 고언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여러 모양으로 사울 왕에 대한 그의 순수한 충성심을 증명해 보였지만 어떤 것도 사울왕의 두려움과 불신과 이로 인한 미움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독을 먹은 짐승”처럼 그렇게 날뛰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진리입니다. “두려움”과 “불신”은 사단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주입하는 치명적인 “독극물”입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신경을 마비시키고 하나님과의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울에게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자면,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도 블레셋 군대와 비교할 때 자신들의 미약함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또 다윗이 구원한 그일라 사람들은 사울왕이 두려워 다윗을 사울왕의 손에 넘겨주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두려움에 그 눈과 귀가 마비된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두려움”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사단의 말을 듣고 있다는 매우 확실한 증거입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우리 마음 속에 주입한 “독극물”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두려움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악한 성분으로부터 온갖 더럽고 무서운 죄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우리 영혼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사랑”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삶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망자로 어렵게 사는 그에게는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할 책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블레셋 군대와 싸워 그일라를 구원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그를 배신하고 사울왕에 넘길 것임을 알았을 때, 그들을 미워하고 보복하는 대신 조용히 그 성을 떠났습니다.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에도 그는 하나님께 그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싸울 때는 천하에 둘도 없이 용맹한 전사였지만, 사울왕 앞에서는 마치 “죽은 개”처럼 순하고 착했습니다. 다윗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는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절인 14절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사울이 매일 (다윗을)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이 한 말씀이 다윗의 평화로운 삶을 전부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눈으로 볼 때, 사울은 그의 “원수”가 아니라 여전히 그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 왕에게 충성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를 사랑했습니다. 다윗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갖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늘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기도하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두려움의 시대”입니다.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팔아 비즈니스를 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시며 (마태복음 24:12),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따르면, 이런 말세의 고통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치 금보다 더 귀한 보배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 속에 맺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늘 넘치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복된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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