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 (누가복음 5:27-3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6. 10. 01:09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

 

누가복음 5:27-3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란 로마 정부의 위임을 받아서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주 로마 정부에 상납할 금액에 더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정해진 세율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3:12-13절에 보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온 세리들이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정한 세 외에는 징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세리들이 부당하게 높은 세금을 뜯어가는 일이 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과거 일제 시대 때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일본인들에게 가져다 주고 그 일부를 착복하여 호의호식하던 일본인 앞잡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일본인보다도 이런 일본인 앞잡이를 더 미워하고 싫어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와 같이 여기던 유대인은 로마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세리들을 개보다도 못한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사실상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리 레위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열 두 제자들 중 하나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절 말씀으로 31,32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세리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참석하셔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를 비난하며 따져 물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자주 그 단순함과 명료함에 말문이 막히곤 합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한테는 필요가 없으며, 오직 병든 사람에게만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굳이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이렇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렇게 당연한 것이,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오히려 매우 부당한 일이 되었을까요? 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사랑하셨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친구로 대하셨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원수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당연한 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받을 일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의 초점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알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일면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가 주위에서 지겹도록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많은 노래와 시와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이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주위에 흔한 남녀간의 애정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덴마크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인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저작들 중에 사랑의 역사 (Works of Love)”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을 꿰뚫는 값진 논술들을 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명령하는 바 이웃 사랑은 남녀간의 애정이나 친구간의 우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차이점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차이점들을 생각하면 이웃 사랑남녀간의 애정은 서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전혀 반대 되는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들자면 본질적으로 이웃 사랑은 사랑 (love)”인 반면, 남녀간의 애정은 정욕(passion)”입니다.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서 변하지 않습니다. 곧 사랑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심지어 그 사랑을 악으로 갚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이는 이웃 사랑의 근본적인 동기(motive)가 사랑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녀간의 애정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그 애정이 식거나 심지어 처음 사랑보다 더 심한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웃 사랑에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그 사랑을 받는 당신(Thou)”입니다. 반면 남녀간의 애정에서 숨어있는 진짜 사랑의 대상은 (Ego)”입니다. 이는 애정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이 라는 세계의 일부이며 나의 소유(property)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애정이란 실상 이기적인 자기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포용적인 (inclusive) 사랑입니다. 곧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수록 그 사랑이 더 위대하고 순수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용서의 기도를 하실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악한 무리들을 제외시키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남녀간의 애정은 배타적인 (exclusive) 사랑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야기처럼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사랑이어야 위대하고 순수하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웃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곧 나를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 한 이 사랑은 변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평안하며, 기쁩니다. 반면 남녀간 애정의 시작은 상대에 대한 정욕(passion)이며 따라서 변하고, 매이며,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글의 저자는 남녀간의 애정을 비하하거나 필요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비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증거하는 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본질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바 사랑은 남녀간의 애정보다 좀 더 고상한 것이 아니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경험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 관념들을 벗어버리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리 레위는 죄인으로 낙인 찍혀 공동체에서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레위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나를 좇으라말씀하심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죄인으로서의 레위의 삶이 그 동안 어떠했을까요?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세리 레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마치 가까이 접촉해서는 안 되는 더러운 병균과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는 돈을 벌기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괴롭히는 나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하심은 그냥 잠깐 그를 만나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생 전체와 레위의 인생 전체를 통째로 묶어버리는 일종의 혼인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레위와 끝까지 함께 하시며 그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이며, 또 예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구원과 영생으로 그를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레위의 삶은 단번에 지옥에서 천국으로바뀌었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미움 받던 버려진 존재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긴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와 이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어떻게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이는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람들은 레위가 죄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같은 이유로 곧 레위가 죄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세리 레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유대인들이 볼 때 레위는 우리라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원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레위 한 사람보다 백 배나 천 배나 더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해가 되는 레위를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냥 레위라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당신(Thou)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그것을 주시고자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를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희생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사랑하시고 그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영혼이 다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전혀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악인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치료가 필요한 병자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물론 나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악명이 높은 이를 꼽으라면 아마도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에 따르면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하며, 그가 우상 숭배자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우상 바알의 사당을 건축하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죽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아합은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들을 저질러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정의 여지가 없는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고 그의 집을 쓸어버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려운 말을 들은 아합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1:27). 이미 악행을 저지를 대로 저지른 그가 이제 와서 회개하는 모습을 볼 때, 사람들은 아마도 웃기고 있네,” “꼴 좋다,” “너무 늦었다하며 그를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를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21:29). 하나님께서 그의 뒤늦은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내리려고 계획하셨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아합 왕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볼 때,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하시며 그를 부르셨을 때, 세리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을 위해 그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고 많은 다른 세리 친구들과 사람들을 초대하여 기쁘고 즐거운 만찬을 즐겼습니다. 레위의 변화된 모습은 회개와 구원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회개와 구원이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8절은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고 말합니다. 레위는 비록 죄인으로 멸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았지만 그에게는 원하는 만큼 풍족한 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괴로울 때면 금고에 쌓인 돈을 꺼내 세면서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온갖 수모와 따돌림을 견디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이를 통해 얻은 모든 것은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인생을 짓누르고 옭아매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런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살다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레위에게는 그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진실로 그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한 그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이 사랑의 기쁨이 흘러 넘쳐서 그의 집은 많은 사람들의 모여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잔칫집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이며,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시편 37: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회개의 일부가 되겠으나, “회개의 참된 뜻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시며, 또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키시기 위해서, 곧 하나님 자신이 우리 영혼의 기쁨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매일 회개하고, 매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나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되며, 결국 그 사랑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헤어나올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또 그 사랑이 되시는 죄인들의 친구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