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마가복음 1:21-28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귀신입니다. 문명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은 “귀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허구적인 존재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천사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 또한 신앙 생활을 한지가 오래 되었고 성경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배웠지만 천사나 귀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고, 편하지 않고, 심지어 두려운 마음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는,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해서, 귀신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조직 신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그 생명력을 잃게 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영적인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귀신들을 쫓아내버린 것이다.” 제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이는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크게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과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며,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이신 하나님을 위시하여 온갖 종류의 영들이 존재하며 활동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 두 세상을 모두 섭렵하며, 또 그 두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영적인 존재들을 그 주인공들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과 그 세상을 채우고 있는 영들이야말로 많은 사건들 속에 진정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와 “더러운 귀신”이 만나 격돌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둘 모두 그 실체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이 사건에서 귀신을 빼버린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을 이해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이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전체에 걸쳐 오직 하나뿐인 성전(Temple)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안식일에 각자의 마을에 있는 회당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오늘날의 예배당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2절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의 그것은 권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자, 귀신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영적인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귀신이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 사이에 대화를 보자면, 이 둘은 서로가 어떤 존재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서로를 향하여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이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들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놀라워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두려워서 떨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컴컴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켜면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벌레들이나 쥐들이 황급히 몸을 감추듯이, 이 더러운 귀신 또한 예수님의 빛 앞에 그 정체가 밝히 드러나고 두려워 떨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제압하시고, 이 귀신 들려 비참해진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며, 또 이 싸움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회당에서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곳에 “더러운 귀신”이 버젓이 드나들며 대놓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밤낮으로 손발을 씻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왜 유대인들은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을까요? 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가 없었을까요? 야고보서 4:7,8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이기고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마음 속의 죄들을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온 마음을 들여 생각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속에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귀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마귀를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 이들의 이러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면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권세가 없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 (authorit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을 “권세 있는 자”라고 하며 (22절), 또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합니다 (27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신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도 주십니다. 마가복음 3:14,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면서 그들을 부르시는 세 가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인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귀신 또한 어둠의 세계를 주관하는 일종의 영적 권세자(spiritual force of evil)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을 무서워하는 대신 이를 대적하고, 제어하고,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제자들의 신분이 “땅에 속한 사람(earthly being)”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 (heavenly being)”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치하는 영적인 권세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하나님의 권세는 밝은 눈과 같다(Divine authority is like the single eye)”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밝은 눈”이란 마태복음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If your eye is single - KJV)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를 똑바로 보시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권세에 순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사로잡으며 나의 밝은 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보이고, 귀신은 귀신으로 보이고, 빛은 빛으로 보이고, 어둠은 어둠으로 보입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되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게 되고, 대적할 것을 대적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권세가 내 안에 살아있어서 마귀를 대적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여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고 대적한 이야기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여 거의 죽음에 눈 앞에 보일 지경이 되신 예수님께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에게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몹시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이 마귀의 말은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벌써 돌멩이가 떡으로 보이고, 유혹하는 마귀가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떡”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잘 아시고 오직 이 하나님께 순복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항상 밝은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눈으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을 막으려 할 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3).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며 그 뜻을 이루는데 온 몸과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는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정말 바늘 구멍만큼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가 예수님께 밝은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귀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며, 또 자신들이 지금 마귀의 권세 아래 있음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악한 영들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영(이사야 11:2)이시며, 또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영(로마서 8:15)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악한 마귀의 더러운 귀신을 분별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권세자가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하여 잘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요한복음 4:24),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영입니다 (요한복음 6:63).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또한 영적 싸움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고 이 영적 싸움을 능히 감당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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