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갈라디아서 2:1-21
지난 몇 주간 한국에서 보스턴을 방문한 손님들을 여러 명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들과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주 하게 되는 대화가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들, 상대적으로 좋은 점들과 나쁜 점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한 목소리로 부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스턴의 청명한 날씨와 맑은 공기입니다. 특히 요즘 한국에서 미세먼지 문제로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라 보스턴의 깨끗한 하늘이 더욱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면서 만나게 되는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과, 초록빛 잔디와, 이슬 맺힌 풀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먹이를 쪼아대는 새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에 누릴 행복을 벌써 다 누린 듯 상쾌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별 도리 없이 하루 종일 먼지로 오염된 공기를 숨쉬어야 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입니다. “공기”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호흡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해서 호흡을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이나 마시는 물은 그나마 어느 정도 가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호흡하는 공기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해로운 물질이 있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살기 위해 계속해서 호흡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공기”를 호흡하듯이, 우리의 영혼 또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의(義)”입니다. “의”란 쉽게 말해서 “옳다고 인정받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공기를 호흡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의”를 호흡함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의(義)’라는 것도 모르고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사는데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영혼은 “의(義)”를 호흡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의”를 향하여, 곧 옳다고 인정받기 위한 방향으로 애를 쓰며 밀고 나갑니다. 저는 “좋은 목사”라고 인정받을 만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로부터 “좋은 부모”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또 그런 인정을 받을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물론 부모만큼은 아니지만 자녀들도 같은 소원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능력 있는 직원”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옳다,” “잘했다,” “의롭다” 라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의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재판장이 되시며, 우리의 영생과 영벌이 이 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이 바로 이 “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 영혼이 “맑은 공기”를 자유롭게 실컷 호흡할 수 있도록 해주며, 심지어 죽은 영혼도 살려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독교 자유 헌장(The Charter of Christian Liberty)”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오랜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리는 선언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노예가 된 적도 없으며 따라서 자유나 해방이란 말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가 어떻게 억눌린 삶을 살았으며, 또 어떻게 그 멍에를 벗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기독교 복음을 간략하게 서술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즉, 하나님께로부터 “옳다”고 인정받는 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삶 속에서 분별하고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 구원을 올바로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의롭게 되는 길”은 바꾸어 말해서 “죄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걸어야 하는 “의롭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외에 달리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외에 달리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곧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의롭게 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 또한 갈라디아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힐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으로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주신 “의롭게 되는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의 육체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고, 또 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자랑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사람들 가운데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지키고 또 이를 교회 가운데 보전하고자 어떤 싸움을 싸웠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주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 특히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위인들 중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하나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아니고, 예수님의 친형제들 곧 성모 마리아가 낳은 아들들 중 하나인 야고보로 (마가복음 6:3),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야고보서 1:1),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13). 이 유명한 자들은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살을 맞대고 살았으며, 또 직접 그 가르치심을 받고, 세우심을 입고,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예수님을 보는 듯 하여 몹시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혹시 이 유명한 이들의 그림자에라도 닿을까 하여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유명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이들이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를 대놓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보는 것은 어떤 사람의 유명함이 아니라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면 그가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책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더 큰 위협은 “유대인 할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이와 함께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와 이런 거짓된 가르침들을 전파하며 사람들이 이것을 지키는지를 감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일시도 이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의롭게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려는 노력을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단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조금 죄인이 아니라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부패하여 소망이 전혀 없는 중한 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인 바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죄를 속하시고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정한 “의(義)”가 됩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와 같아서 우리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들며 죄로 인해 썩은 세포들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회복시킵니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온 힘을 다해 이 예수님의 은혜를 호흡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만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그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꽤 유명한 사람을 내세워 자신들만의 그룹(associate)을 만들고,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정하고, 그 규칙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대신 모세를 내세워 자신들의 종교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두 그 법 아래 가두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 대신 베드로를 내세워 자신들의 종교를 만들어 놓고 돈을 받고 의(義)를 팔았습니다. 이렇게 큰 종교 집단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수없이 많은 공식 비공식 단체들과 모임들이 있고, 그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규칙들이 존재하며, 또 그것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눈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둘만 모여도 서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으며, 이것은 부모 자식 사이에나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유독성 미세먼지가 가득한 공기를 매 순간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기 위해 숨을 쉬지만 오히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이런 세상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인정받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영혼을 옥죄는 사슬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 갈 뿐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 여전히 죄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조차 없이 그대로 눌려서 말라 죽고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영혼에 자유와 생명을 주는 맑고 시원한 공기와 같습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 대신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롭다 하심”을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호흡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몸 속에 있는 나쁜 기운들을 뱉어내고 대신 맑고 깨끗한 기운을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나의 옮음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 속이 “죄의 기운”으로 가득하며 세상은 “정죄하는 법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오직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없는 자비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유명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자유로우며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는 참으로 맑고 시원한 공기로 가득합니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숨통이 트이고, 죄에 눌려있던 영혼이 살아나며, 노예처럼 눈치를 보던 비굴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감싸고 섬기는 사랑의 종이 됩니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이 믿는 자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자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깊이깊이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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