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6-1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8. 26. 01:0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6-18

 

오늘 설교의 본문은 지난 주의 것과 같지만 설교의 초점을 달리 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6-18절 말씀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각각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6-9: 예수님께서 참빛으로 증거되심

10-13: 예수님께서 주()로 오심

14-15: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심

16-18: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심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참빛이 되심을 배웠습니다. “참빛이란 참된 행복의 근원또는 참된 생명의 근원으로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행복의 근원이시며 참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짓 빛들에 속지 않으며, 참빛 되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을 가장 사랑할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더 나아가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이 말씀의 본질은 지난 번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하며 (10),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로 오셨다고 합니다 (11). 이 말씀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이 세상의 주인(Lord)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예수님을 알아보고 또 그들의 주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주 되신 예수님께 행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또 영접하지 않은 것은 물론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 죄를 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며 스스로 왕노릇하려는 사람의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창조주이시며 주인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거느리고 요란한 나팔 소리와 함께 큰 영광과 권능으로 임하신 것이 아니고, 갈릴리 나사렛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고요한 밤에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너무도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아무도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조용하게 보통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이는 주님께서 평화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어떤 권세일까요? 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과거에 비해 어떻게 달라집니까? 많은 질문들이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이런 여러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이 증거하는 바 한가지 매우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사람으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별로 의미(relevance)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배워나가며, 또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화해의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선물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심으로 그 얼굴을 우리에게서 가리우시고, 우리는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선물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장벽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휴가를 받아 집에 가면 저를 반겨주시는 어머니의 환대가 얼마나 따뜻하고 푸근한지 모릅니다. 거친 군복과 군화를 벗고 대신 어머니가 주시는 보드랍고 편안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신 밥을 먹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마음이 평안하고 자유롭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저에게 주시는 것들은 어머니가 갖고 있는 것들 중 최고입니다.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어머니에게 기름진 햅쌀이 있는데 그 쌀을 쓰지 않고 일년 묵은 퀴퀴한 쌀로 밥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아끼는 반찬이 있는데 그 반찬이 아까워 몰래 감추고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TV에 마침 어머니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밥상을 차리지 않고 배고픈 아들을 잠시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와 그 아들 사이에는 이런 사랑가장 좋은 것을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사랑도 이와 비슷한 사랑입니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 훠~~씬 더 크고 깊고 넓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되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는사랑입니다. 우리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사야 49:15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신실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교만함과 죄악됨으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하나님을 잊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교만하고 죄악된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계속해서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사야 65: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셔서 이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타이르시고, 때로는 고난을 주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길 아무래도 내가 보인 사랑이 부족했던가 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시 그는 공경하리라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13). 예수님은 하나님의 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십니다. “독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심지어 내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가장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화해의 선물을 받고 마음을 돌이켜 그 사랑의 품에 안기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선물이십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 (sacrifice of atonement)”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3:25). 곧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셔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장벽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처럼 가까워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비록 가깝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벽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주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연합(union)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3,2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26절에 이렇게 더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을 믿는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 품에 안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 구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예수님께서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의 사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친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시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며 무엇이든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한 그것을 받으리라하시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 또는 그 권세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설명하는 세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의 원수였던 옛사람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세가지 키워드란 바로 사랑자유(또는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옛사람의 삶을 상징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우리 옛사람의 삶을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우리 새사람이 갖는 권세는 사랑과 자유와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2

019/8/21) 사람들의 눈을 끄는 뉴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황 프란시스가 설교를 하는 도중에 한 자폐증을 앓는 소녀(Clelia Manfellotti, 11)가 강단 위로 올라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장난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소녀의 어머니와 교황의 경호원들은 당황하며 놀라서 아이를 강단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이 말했습니다. “아이를 그냥 두세요 (Let her be)!” 아이에 대한 교황의 인자함에 사람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이 뉴스에서 한 가지 사실이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교황이 아이를 그냥 두세요!” 했을 때 사람들은 교황 할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만일 경호원이 아이를 그냥 두세요!”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사람들이 여전히 감동하며 박수를 쳤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겠죠. 그 경호원은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황과 경호원 사이에 권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할 권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말이죠! 하지만 경호원은 다릅니다. 그에게는 그런 권세가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정해진 규칙을 따라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두려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교황에게는 심지어 그 정해진 규칙을 무시할 권세도 있습니다. 교황에게는 정해준 규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 홀(hall)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교황만그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권세가 바로 이 권세입니다. 교황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사랑의 자유를 누리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무서워하는 종의 영(spirit of bondage to fear)이 아니라 양자의 영(Spirit of sonship – 로마서 8:15)이 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랑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사랑의 자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깊이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의 선물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한 가운데 무시로 아버지께 나아가며 그 사랑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을 마음껏 자유롭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한 가지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따라서 그 축복을 잘 누리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9:42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고자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는데 죄로 눈이 멀어서 그 선물을 싫어하고, 걷어차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 안타까우신 나머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선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평화의 선물을 받아 누림으로 참으로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