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빛이 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6-18
오늘 설교에 붙인 제목은 “참빛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은 빛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빛 곧 “참빛 (The True Light)”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시는 참빛이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빛이란 쉽게 말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포괄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빛의 반대말은 “어둠”이며, 이것도 역시 모든 “나쁜 것들”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빛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빛”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빛은 “좋은 것”을 나타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빛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또는 “행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청춘들은 천사같이 아름답고 착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기를 어둠 속에서 아침 해를 기다리듯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밝은 빛을 선사하는 행복의 근원은 “돈”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참빛” 다시 말해서 “참된 행복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이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가지 이야기는 사람이 행복의 근원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행복의 근원을 우리 속에 다시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그 행복의 근원 곧 참빛이 우리 속에 어떻게 회복되는지의 과정을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6-18절 말씀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각각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6-9: 예수님께서 참빛으로 증거되심
10-13: 예수님께서 주(主)로 오심
14-15: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심
16-18: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심
이 말씀들은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속에 행복의 근원을 회복하시는지 그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떠나, 행복한 낙원을 삶을 잃고 아무런 낙이 없는 어둠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증거되시고, 또 그 빛이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 안에 충만해지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나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주인 되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행복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나의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오시며 나와 하나가 되어가는 매우 길고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일찍이 준비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치밀하고 정교하고 우리 가운데 실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께서 “참빛”으로 거하심으로 이 빛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지도록, 그래서 영원토록 변치 않고 항상 차고 넘치는 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참빛”이 되실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의 “참된 행복의 근원”이 되실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 또는 “내 안에 임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돈”이 아니라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주머니 속의 돈이 아니라면 수억의 돈이라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믿는 크리스천들조차도 자주,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신다고 믿더라도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어둠”이었습니다. 곧 두려움과 절망이며, 죽음이었습니다. 이 어둠 속에 버려진 우리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 속에 침투하여 들어오시는 과정은 다시 말해서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 버려져 있던 내 영혼 속에 주님께서 임하시고, “나의 참빛”이 되시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참빛”이 되시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행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어리석은 부자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부자는 그의 밭에서 거둔 곡식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더 큰 곡간을 지어 그곳을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의 소유물이 넉넉한 만큼 그의 영혼 또한 넉넉하고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의 넉넉한 소유물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실상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매우 가난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not rich toward God)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21).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의 생명조차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인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는 우리가 참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나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나의 참빛이 되시는 그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유”는 오직 나와 예수님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곧 내가 예수님을 가지며, 예수님께서 나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4a).
앞에서 “빛”을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며 나에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재물”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재물이 쌓아둘 곳이 없을 만큼 많아지자, 그의 영혼은 빛으로 충만해졌습니다. 행복하고 평안했습니다.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자주 자녀들의 행과 불행이 자신들의 인생의 명(明)과 암(暗)을 결정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다른 일들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하더라도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 사람에게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있고, 이것이 그 사람의 행과 불행을 결정하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빛”이 되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께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곧 내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고서는 예수님께서 내게 “참빛”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어떤 빛(a light)이 되실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빛(The True Light)”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내 안을 환하게 비추시는 참빛이 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이란 바로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을 모셔놓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놓인 보좌에 앉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온 힘을 다해서 내 속으로 파고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진리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간절한 소원과는 달리 아들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자식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초하여 이 말씀은 다시 쓴다면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참빛이니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말씀이 가슴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네게 곧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으면, 마치 불이 켜지듯 마음 속에 환해지고 답답하던 가슴이 탁 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차지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 속 가장 높은 자리에 하나님 자신이 앉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유일한 “참빛”이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시큰둥한 태도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들이미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참빛”이 되심을 영접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실 때도 주저하지 않고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마침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길고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 속의 보좌에 앉게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참빛”이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대신 하나님을 그의 행복의 근원으로 붙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1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1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정말 이런 빛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빛들이란 거의 대부분 “촛불”처럼 가물가물하며, 켜졌다 꺼졌다 하기를 반복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평안과 행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염려와 근심의 근원이 되곤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고민할 일들이 많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늘 그 자리를 위협하는 위험한 경쟁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언젠가 사람들에게 잊혀질 것이 두려워서 홀로 울며, 자식이 많은 부모들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 자체가 매일 죽음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생로병사”의 고단하고 허망한 어둠의 여정입니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가물거리는 작은 행복이나마 잘 지키며 살다가 죽으면 그게 복 받은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와 전혀 생각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빛은 심지어 죽음도 끌 수 없는 참빛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체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예수님께서는 병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진 아버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35).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7:13). 예수님의 빛은 가장 절망적인 죽음의 어둠 가운데도 밝히 빛나며 능히 그 어둠을 쫓아내버리는 “참빛”이 되십니다. 이 빛은 “촛불”처럼 가물가물하며, 켜졌다 꺼졌다 하는 빛이 아닙니다. 이 빛은 죽음에도, 죄에도, 어떤 두려운 인생 문제에도 꺼지지 않으며, 항상 밝히 빛나며 힘차게 타오르는 영원한 빛입니다. 그 빛이 우리 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내 속에 거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시며, 나의 행복이 되시며, 나의 기쁨이 되시며, 나의 평안이 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빛”이 되십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른 빛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무엇인가를 손에 넣기 위해, 또 그것을 지키고 놓치지 않기 위해 일생 수고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은 “거짓된 빛”일 뿐입니다. 한 순간은 빛인 것처럼 반짝이지만 곧 꺼져버리고 일생 그것을 좇아 달려가던 그 사람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버려지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나의 참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꺼지지 않는 빛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시며,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으며, 예수님 밖은 오직 어둠과 죽음뿐입니다. 가만이 눈을 감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영혼을 비추는 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참빛” 되신 예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내 영혼이 오직 예수님의 빛으로 가득할 때까지 내가 붙들고 자랑하는 거짓 빛들을 분별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빛”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낙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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