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 겸손한 사랑
창세기 18:1-33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축복하시고, 또 소돔 성의 심판에 관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논의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축복과 약속의 말씀들이나 또 그와 함께 도모하시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들입니다. 이것들에 비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작고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서두 부분을 보면 “오정 즈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있다가”라고 쓰여있습니다. 창세기 17:17절을 보면 이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이미 100세를 넘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의 말대로 “낙이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너무 늙어서 이제 아무런 낙도 기대할 수 없는 아브라함이 장막 문 앞에 홀로 앉아서 정오의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은 기껏해야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애잔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깨뜨리는 놀라운 반전들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상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 속에 “겸손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소개하자면 “하나님의 교회의 최초의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의 역사를 요약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키우시는 과정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식구들이 모인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첫 성도는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처음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오랫동안 그를 유일한 성도로 양육하시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세우신 이 첫 교회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그렇고 그런 모임들 중 하나이며,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단체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식구들(God’s family)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회(God’s council)입니다. 그리고 이 공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세우신 왕들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governors)입니다. 노인 아브라함은 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거주할 땅도 없었고, 다스릴 나라도 없었으며, 심지어 대를 이을 자식조차 없었습니다. 식구라고는 달랑 늙은 사라와 첩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텐트 속에서 생활을 하며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는 나그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하나님의 방백(Prince of God – 창세기 23:6)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그를 대적할 자들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세상 왕들의 연합군조차 아브라함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14장).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렸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창세기 12, 20장).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진정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교회의 조상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세우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눈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 아브라함의 “겸손한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그의 “겸손한 사랑”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절까지는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9-2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 자손들을 축복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22-33절은 아브라함이 소돔 성의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들은 매우 특별합니다. 성경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아도 하나님과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대면해서 친밀하게 교제하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터놓고 사업을 논의하는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하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로 아브라함의 내면에 열매로 맺힌 바 그의 “겸손한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은 겸손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온유하고, 인자하며, 다정했습니다. 그는 높은 산 위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의 눈과 마음은 늘 낮은 곳을 향하여 있었으며, 그곳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근심하였으며,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런 아름다운 성품을 실감나게 만져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므레는 지도에 “헤브론”으로 표시된 곳인데 (창세기 23:19 -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곳은 후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장사 지낸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며 (창세기 23:19), 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이 장막을 치고 거주했던 곳입니다 (창세기 35:27). 헤브론은 해발 927미터(약 3000피트)의 고지에 형성된 평평한 지대로, 유대 산지에 있는 성읍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 중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영어로는 “looked down toward Sodom)……”, 그리고 창세기 19:27-28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말씀을 볼 때, 아브라함은 그가 거주하고 있던 높은 헤브론 산지에서 평야 지대에 위치한 소돔 성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오 즈음 아브라함이 그의 장막 문에 앉아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그의 앞에 문득 사람 셋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본 아브라함은 곧 달려나가 그들을 맞이하며 몸을 땅에 굽히고 간청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세 사람을 맞이하는 자세는 말할 수 없이 겸손하고, 친절하며, 호의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3:2절 말씀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히브리서 말씀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 세 나그네들을 대접한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곧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 줄 모른 채 이렇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브라함이 이 낯선 나그네들을 이렇게 극진히 대접한 일은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정서로는 이해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시대에서라도, 창세기 19장에 소돔 성 사람들이 그 성을 방문한 천사들을 매우 난폭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보기에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쉬어가게 하고 음식을 대접할 수는 있겠지만, 아브라함의 손님 대접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나그네들을 “주”라고 부르며 높이고, 또 자신을 그들의 “종”으로 낮추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의 자만심은커녕, 오히려 그들을 섬기는 것을 자신이 받는 은혜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고……” “떡을 조금 가져오게 하고……” 하면서 손님 앞에 드리는 것들을 모두 “겸손의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겸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처럼 바쁘게 움직이며 집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취하여 음식을 준비하고, 이것들을 가져다가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자신을 하인처럼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는 영락없이 “종”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헤브론 산지에서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축과 은금이 풍부한 부자였으며 (창세기 13:2), 그의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의 수만 해도 300명이 넘었습니다 (창세기 14:14). 헤브론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방백(Prince of God)”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그가 낯선 나그네들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낮추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겸손한 사랑은 소돔 성 사람들을 위한 그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함”을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언뜻 듣기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의인들”을 위한 기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사는 “악인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가 의인들을 언급한 것은 단지 악인들을 용서할 “명분”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이 죄악의 도성에서 고생하는 “의인들”이 아니라, 이제 곧 쏟아질 하나님의 무서운 불심판도 모른 채 여전히 악한 삶을 살고 있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혹시 있을 50명의 무죄한 의인들을 핑계로 대면서 하나님께서 이 악인들을 용서해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소돔 성에 의인 50명이 있을 것인지에 자신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이 커트라인을 45명으로 낮추어 재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치를 다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그리고 마침내 10명으로 낮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다섯 번이나 바꾸시도록 설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었습니다. “27절에 보면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하며 자신을 “티끌”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50명을 10명으로까지 깎아 내리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함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끈질기고 집요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겨우”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악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소돔 성 사람들의 죄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심판하신다고 할 때, “아 드디어 때가 왔구나. 잘 됐다 이 죄인들 뜨거운 맛 좀 봐라!” 하며 마음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할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힘들어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불가사의한 성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겸손한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 높이고, 또 자신을 그들의 종으로 낮추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상관도 없는 저 멀리 소돔 성 악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티끌”로 낮추면서, 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낮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겸손한 사랑”을 할 때는 더 이상 100세가 넘어 기력이 떨어진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생기 있고, 민첩하게, 강인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겸손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가르쳐주신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4:12-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은 나와 가까운 관계가 있는 “벗이나 형제나 친척” 그리고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는 “부한 이웃”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청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이 되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대신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사랑”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그 모든 사랑의 수고들을 기억하시고 “부활 후에” 영원한 상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참으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난한 나그네이거나 멸망의 위험에 처한 죄인일 경우 “더욱” 사랑했습니다. 아무런 자랑도 없이, 아무런 기대나 바램도 없이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사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마치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찾으시며 곧 그녀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장막 안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나이가 늙고 사라도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7:17절에도,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이며 또 그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면서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이 얼핏 생각하면 “불신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사라가 애기를 낳는다고?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이게 가능한 일이야? 오 마이 갓!!!”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놀라운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은 그 말씀들을 듣고 큰 놀라움도 없이 습관적으로 “아멘!” 하며,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곧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다면, 우리는 그 말씀이 너무 어이가 없고 놀라워서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속으로 웃어야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사실일까 어리둥절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기이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시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믿을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가득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장막 안에서 속으로 웃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웃음을 용납하셨습니다. 동시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의 늙은 몸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직 이 하나님을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랜 약속을 재삼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큰 약속도 주셨습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합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는 “천하만민을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뜻에 매우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낮은 자들을 향한 “겸손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낮고 천한” 천하만민을 복 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식구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천하만민을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겸손한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고상한 하나님의 친구로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겸손한 사랑”입니다. 더욱 낮아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진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높은 자요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이 사랑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겸손한 섬김을 통해서 천하만민을 복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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