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5:1-14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우리의 생각에 참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이 우리를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만들었는가? 세상의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저 파도를 따라 떠돌아다니는 통나무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 얻은 바 우리의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기독교 역사관”이 아니라 실제로 “진정한 역사 (the History)”입니다. 그리고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구속의 역사(history of redemption)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첫 사람 아담을 찾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실 때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기 3:9). 이 하나님의 질문이야말로 역사를 진행시켜온 하나님의 유일한 질문이며 가장 크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갈 때 제 딸 마리아와 에스더는 각각 4살과 2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곳에서 6년을 지낸 후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미국으로 나오기 전 2년 동안을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마리아, 에스더는 거의 외국인이어서 한국말과 문화를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가 학교에서 숙제를 받아왔는데, 그것은 서울에 있는 고궁을 방문하여 옛날 건물들을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저는 두 딸을 데리고 경복궁을 찾았으며 저는 마리아의 숙제를 도와주었습니다.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씨에, 고궁은 수많은 방문객들로 매우 붐볐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에스더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시야가 미치는 어디에도 에스더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정신이 나갔습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저의 모든 신경은 오직 한가지 문제로 긴장했습니다. “에스더가 어디 있지?” 저는 왜 이곳에 왔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따뜻한 봄날의 즐거움도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마리아가 옆에 있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저의 머리 속은 오직 한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에스더가 어디 있지?” 후에 이 순간의 느낌을 회상하면서, 저는 잃어버린 아담을 찾으시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아는바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제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나 ‘제사’라는 말을 단지 구약 성경의 개념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인류 역사의 전체가 구원의 역사이며 이것이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임을 생각할 때, ‘제사장’과 ‘제사’는 결코 우리에게 상관없는 단어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한번도 ‘고어’가 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말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계시며, 그가 이미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단번에 (once for all)” 온전한 제사를 드렸으며, 이를 통해 구약의 제사제도를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만드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과 ‘제사’는 우리의 매일의 삶게 긴밀하게 얽혀있는 매우 중요한 ‘현재진행형’ 개념들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사도 요한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며 증거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계시록 1:5a-6). 이러한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셔서 그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로 드리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실상 ‘제사장’과 ‘제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분명히 계시된 바와 같이,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본질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리켜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과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무식하고 미혹한 우리 죄인들과 같아지셨으며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과 하나님께서 그를 대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은 마치 야곱의 사다리가 높이 계신 하나님의 보좌에 다다른 것처럼 하나님과 죄인들을 연결시켜주는 장대한 삼차원 구조물입니다. 이러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한 정성을 요구하는 매우 복잡한 프로젝트이며, 단 한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는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해 6월,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태국의 유소년 축구팀 소년들과 그들의 코치가 물이 가득 찬 동굴 속 깊은 곳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Tham Luang Cave라고 불리는 동굴 속에서 실종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또 그들이 살아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몇 명의 용감한 잠수부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속의 길고 좁고 어두운 통로를 헤엄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종된 지 10일만에 영국의 동굴 잠수부들인 Richard Stanton과 John Volanthen이 입구로부터 약 2마일(3킬로) 정도 떨어진 안쪽의 좁은 공간에 갇혀있는 이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소년들이 이 잠수부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도 이것은 하늘에서 울려오는 천사의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동굴 속 깊고 어두운 곳에 갇힌 이 태국 소년들은 우리의 죄 속에 갇힌 우리 자신들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 죄의 동굴 또한 깊고 어두우며, 물로 채워진 길고 좁은 통로를 제외하고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여러 날을 보낸 후 이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울면서 죽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조자가 물속으로부터 솟아나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다들 괜찮나요?” 오늘 본문 말씀의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잠수부들이 동굴 깊은 곳에 갇힌 소년들에게 내려와서 그들 곁에 앉은 것과 같이, 예수님 또한 죄인들과 “진짜로”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육체의 연약함 속에 가두셨습니다. 이 연약함에는 출구가 없으며 아무도 살아서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 깊은 절망의 공간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앉으시고 거기 온유하게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우리의 죄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악함도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무식함과 미혹됨도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고의적이고, 교만하고, 속이는 범죄도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연약함이며, 이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늘 지극한 온유와 평안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동굴 속 깊은 곳으로 내려갈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며 또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죄라도 능히 견디시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에 관해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 따르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존귀’와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목이 곧은 죄인들 사이에 서서 그 몸이 찢겨나가기까지 그 둘 사이의 긴장을 견뎌낸다는 것은 결코 ‘존귀’도 ‘영광’도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동굴 잠수부들인 Richard Stanton과 John Volanthen은 저와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이 둘은 후에 George Medal이라는 훈장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주는 두 번째로 높은 상이라고 합니다. 이 상을 받은 후 BBC News와 가진 인터뷰에서 Volanthen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상을 받은 것은 참으로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도 한 명의 부모 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구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이 Wild Boars(축구팀 이름)를 그들의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구조팀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더 큰 명예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이들은 멀리 지구의 반대쪽에 사는 몇몇 가난한 아시안 가족들의 불행을 못 본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집에 머물며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결코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사고를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이 아이들을 구조해 그들의 부모들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비할 바 없이 값진 명예로 여겼습니다. 이들에게는 이 명예가 모든 두려운 위험들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헤아리시고, 같은 마음으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함께 하실 때, 이 아들이 땅으로 내려와 잃어버린 자들의 제사장이 되시는 것은 매우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며, 이 영광은, 비록 견디기 어려운 수치와 고통을 수반하지만, 주님께서 하늘에 누리시던 신적인 영광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한테는 이것이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 사이에 일어난 가족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잃어버린 자들의 형제가 되시며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되돌리시고자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기쁘게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이유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 아래 갇혀 있으며 마치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동굴에 갇힌 태국 소년들을 구조할 때, 잠수부들은 먼저 컴컴하고 물로 가득 찬 2마일이나 되는 길
고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안내 케이블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소년들은 한 사람이 두 명의 잠수부들과 한 조를 이루어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잠수부 한 명은 소년의 공기 탱크를 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다른 한 명은 소년의 뒤에서 빛을 비추며 따라왔습니다. 이렇게 세 명이 한 팀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미리 설치한 케이블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땅에서 하늘로 연결된 생명의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과 자신을 따르는 각 사람 사이를 생명줄로 연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생명의 길을 여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7-10절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 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생명의 길을 닦아놓으셨으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경외하여 순종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고난 받으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42). 예수님께서 마시고자 하셨던 컵은 죽음의 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 순종이 그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고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과 연합하며 그의 사랑에 거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시고 그곳에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생명줄 곧 “순종”을 통해 자신과 연결된 각 영혼들에 대해 영생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사야서 50:10-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혔을 때, 우리 가운데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생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보내신 종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어둠 속에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불을 밝히고 자기의 길을 걸으며 동굴 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사람들을 속이며 유혹하는 거짓 빛들이 수없이 많이 켜져 있으며, 이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빛들의 유혹을 이기고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심지어 그것이 우리를 죽음 같은 어두움으로 인도할지라도 순종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는 순종을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과 같이,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됩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며, 주님 외에 아무도 다른 이가 없습니다. 그의 아들을 그토록 놀라운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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