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고린도전서 15:1-11
오래 전에 한 성경공부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제 막 크리스천이 되어 순례의 길을 시작하는 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 형제를 데리고 어떤 건물로 갔습니다. 그 건물 안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십자가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천사는 형제에게 그가 여행 중에 늘 십자가를 지고 다녀야 할 것이라고 말해주면서, 그의 앞에 있는 여러 종류의 십자가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십자가는 크고 무거웠으며, 어떤 십자가는 작고 가벼웠습니다. 이 형제는 손바닥 안에 딱 들어오는 아주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이것이라면 그의 먼 여행이 매우 편하고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는 이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손에 쥐고 마침내 순례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십자가가 가벼운 만큼 그의 발걸음도 가볍고 빨랐습니다. 길을 가다 보니 아주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낑낑대며 더디게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지나쳐 한참을 더 걷다 보니 길이 조금씩 험난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 앞에 물이 세차게 흐르는 협곡이 나타났습니다.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길을 걷던 한 여행자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이 여행자는 자신의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협곡 위에 걸쳐놓아 물을 건너갈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리를 건너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무게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들도 많고 이들의 신앙생활의 모습도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골몰하는 반면, 어떤 사람의 믿음은 가벼워서 별 생각이 없이 교회를 다니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죄에 대한 깨달음”일 것입니다. 곧 내가 깨달아 알고 있는 내 죄의 무게가 곧 내 신앙의 무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죄의 무게가 다시 “은혜의 무게”가 되며, “믿음의 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내 죄의 깊이와 무게만큼,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신자를 꼽는다면 아마도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의 본성을 깨닫고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또 디모데전서 1:15절b에서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백합니다. 그는 성령의 비추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런 죄에게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명처럼 붙들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힘입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말씀을 잘 지키고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오늘 본문의 3b-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복음” 곧 “복된 소식(Good News)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분명히 “구원의 복음”인 것은 확실하지만,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지키는데 있어서는 시작부터 큰 난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이 바로 “우리 죄”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가장 큰 “아이러니(Irony)”는 “오직 죄인만이 구원을 받는다 (Only sinners are saved)”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심은 죄인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자신이 구원자(Savior)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죄인(sinner)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구주 예수님의 복음이 죄인들에게 참된 구원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을 죄인으로 발견한다는 것, 곧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로마서 2:4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신 인도하심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숨은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파헤치시고, 응징하시는 식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면서 우리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죄의 열매를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용기 있는 마음으로 눈을 열면,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남긴 여러 상흔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죄의 열매”는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정과 욕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사나운 죄”를 눈으로 보고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회개할 때 그 죄가 예수님과 함께 못박히고 용서되는 것입니다.
복음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성경대로”임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성경의 역사(history)는 한 마디로 말해서 “구속의 역사(history of redemption)” 또는 “구원의 역사(history of salv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타락”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사람을 도로 찾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 역사의 바로 시작점에 선포됩니다.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장차 여자의 몸에서 날 구원자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정수리 곧 사망 권세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최초복음” 또는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사실 “죽음과 부활”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이는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들어서 그 몸이 죽은 자처럼 되었지만 그 몸에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 11: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으며, 그를 이어 여호수아는 새로 태어난 세대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여호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시편 23). 이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성경대로” 된 것이며, 또한 성경의 모든 계시들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참 단순합니다. “나의 전한 그 말” 곧 “복음”을 잘 지키고 이를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전부라면 조금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듣는 것,” “보는 것,” “받는 것,” 그리고 “듣고 보고 받은 것을 마음으로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는다(to be saved)”는 말 자체가 우리들의 “전적인 무능력 (total incapability)”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다만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은 사람의 능력을 전혀 벗어난 하늘 나라의 거룩한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의로운 죽음”이며 따라서 “생명을 잉태한 죽음”입니다. 그것은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을 열매 맺을 그런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2:24). 그것은 죄의 결과로 일어나는 사람들의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랑을 보고, 듣고, 그 안에 거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그 가운데 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매일 회개하며 매일 복음의 말씀을 붙들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우리 속에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그 위에 선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화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증거하면서, 자신의 옛 모습을 상기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의 삶 전체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음껏 그 원하시는 일들을 하시며, 내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바다 건너편으로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그곳은 이제까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곳은 사나운 애굽 왕 대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곳은 땅에서 수확한 음식 대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는 곳입니다. 그곳은 소망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비참한 노예 생활 대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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