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23-3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4. 1. 03:17

산 자의 하나님

 

마태복음 22:23-3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바 부활에 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사두개파이라는 종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바리새파와 더불어 유대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람의 영혼은 죽음으로 끝나고 소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영적 세계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사람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도 부인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거의 무신론자들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삶은 지극히 세속적이어서,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와,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의 마음의 고향은 바로 죽음에 갇혀있는 육체와 또 그 육체가 속해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2b절 말씀 그대로, 이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부활은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일어나서는 안 되는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도전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마음의 고향은 죽음에 갇혀있는 육체와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마음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은 마음의 고향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잠시 머물며 여행을 하는 외국인 것입니다. 이들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가 된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저희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거기에 바로 내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이들의 질문은 선지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규례를 근거로 한 것인데 신명기 25:5-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사두개인들은 이렇게 성경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하며, 그들의 관심사 또한 천박하게 비뚤어져 있습니다. 두세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모두 자식을 낳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이 와중에 이 가엾은 여자는 일곱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으며, 사는 동안 일곱 번이나 남편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참으로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삼류 타블로이드 잡지에 실릴만한 가십(gossip) 거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죽음과 부활은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조롱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것과 어제 산 주식 가치가 내일 얼마나 오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었습니다. 죽음 너머의 일을 말한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한마디로 난센스(non-sense)”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그들이 이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부활이 허황된 난센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의도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에 그들에게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29,3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없는 진리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은 죽음처럼 어두웠으며, 그들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이제 성경을 알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알도록 도우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눈과 귀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영혼 속에 말씀으로 임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을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죽음의 한계따위를 인정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죽음이 바로 난센스(non-sense)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죽음이란 마치 태양 표면에 있는 그늘(shade)과 같습니다. 태양 표면에 그늘이 생길 수 없듯이,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기능이 멈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더 나아가, 이 조건에 따라 주어진 생명 또는 죽음은 절대적인 생명이고 절대적인 죽음이며 다른 아무것도 이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며, 또 산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곧 하나님 밖에 있는 자는 살아도 죽은 자이며,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4).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은 또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한 후에도 돌로 떡을 만들어 배를 채우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마태복음 4:4). 이 말씀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지금내게 역사하며 내 생명을 살리고, 유지하며, 더욱 풍요롭게 하는 참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데 온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경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구약 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에도 죽은 자의 부활을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열왕기하 4장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겔서 37장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그러자 그 뼈들 위에 힘줄과 살과 피부과 생기고, 또 생기(breath)에게 대언하자, 생기가 그 몸에 들어가 그것들이 살아나서 큰 하나님의 군대를 만듭니다. 또 시편 기자는 생명의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8-11). 구약에서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들 중 백미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는 이사야서 53:12절 말씀일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놀라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파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사두개인들은 오직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성경 말씀들 대신 모세오경 중 하나인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 하나님께서 선지자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인용하셔서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31-32절 말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자신을 소개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죽은 지 약 400년이 지나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들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하나님의 생명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 역사하며, 그 죽음을 이기고, 항상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죽음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매우 파괴적이고 절망적이어서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하고 또 절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을 비웃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조롱하며 이를 난센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조롱하시며 이를 난센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새 몸을 입고 부활할 때에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망을 향하여 조롱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4-55).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담대하게 소리칠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음의 고난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일생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죽음의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며 이 주님 안에서 죽음 너머로보이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은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조롱하며 담대하고 자유롭고 기쁘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내 영혼을 붙드사 죽어도 살아있는 진정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을 조롱하고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산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