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3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5. 22. 04:29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32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염려는 우리 사람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들 난제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염려만큼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망칠 아니라, 염려(두려움, 불안 등을 포함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독한 연기처럼 우리 영혼을 마비시키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염려 문제를 해결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맑고 자유롭고 행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라는 말의 어원은 주의를 빼앗기는 (distraction),” “마음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는 (heart divided into pieces)” 등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마치 밤새 머리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주변의 일들이 머리 속으로 기어들어와 우리 마음을 분주하게 만듭니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갖고 싶지만, 어느새 마음 속은 시장바닥처럼 여러 염려들로 시끄럽습니다. “먼저이런 걱정거리들을 해결해야만 내게 평안한 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육신적인 존재일 그는 자신의 행복이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밖을 내다보지만, 마침내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행복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A man who as a physical being is always turned toward the outside, thinking that his happiness lies outside him, finally turns inward and discovers that the source is within him).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체로 , 우리는 염려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과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외부적인 것들을 의지해야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까? 이는 우리 행복의 근원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상 마음을 나누거나, 주의를 빼앗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마음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행복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천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며,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영적 진리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5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목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소중한 몸과 목숨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대신 소중한 몸과 목숨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 하십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며,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한다는 것은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음식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의복이 몸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주 염려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목숨보다 음식이 중요하며, 몸보다 의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착념하며, 이것들을 생각하고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결국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며, 이끌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끼(bait) 같습니다. 사단은 미끼를 이용하여 우리의 삶을 그의 마음대로 조종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이것들을 좇아 염려 속에 끌려다니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인생의 시간을 소진하고 몸과 영혼이 핍절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목숨보다 음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몸보다 의복을 중요하게 여겨 염려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육체 (physical being)”였습니다. 그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훈련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음식과 문제로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출애굽기 16:3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민수기 20:3-5절에서 이들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은 죽음 매우 쉽게 함부로 말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Patrick Henry 말하기를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들에게 목숨이란 좋은 음식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사랑하셔서, 많은 유월절 양들을 희생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은혜의 축복으로도 포기할 없고 양보할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제 돌이켜보니 애굽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이었습니다 (민수기 16:13). 말은 안했지만, 아마도 이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면서, 애굽 바로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는 그들이 목숨보다 음식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이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가난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귀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며, 보금자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요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내가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우리 마음을 부요하게 하는 , 우리를 귀한 존재로 만드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중에 가장 먼저는 아마도 많은 소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자신의 창고에 여러 곡식과 물건을 많이 쌓아 두고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예비한 것이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가리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라고 하십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부자였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국은 비참했습니다. 사람의 존귀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소유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보시면서보라 얼마나 귀하냐!” 하시며 놀라워하십니다. 천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사랑에 거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존귀함을 얻게 됩니다.

 

염려는 무익하며 무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항상가장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자나 있느냐?” 어떤 성경 번역은 부분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생명을 시간 있느냐?”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몸이나 목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됩니다. 염려가 많은 사람의 얼굴은 마치 시드는 꽃처럼 어둡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의 표현은 시적이지만 또한 진리입니다. 우리 교회 앞뜰에도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많이 피어 있습니다.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습이 참으로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입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도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한가지 입니다. “믿음이 적은 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살펴야 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다름이 아니라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안에 담고 모실 만큼 그렇게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가장 영광으로 입히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능히 받아서 담을 있어야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세상의 것들을 좇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은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여져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선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미워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선(second best)”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불신앙과 조급함으로 인해, 차선책을 남겨놓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여러 해를 보낸 마음이 조급해져서 여종 하갈로부터 아들 이스마엘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오직 하나님만 홀로 선하시며, “차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약의 때를 대비하여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가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8:11). 이런 의미에서, 염려는 우리의 영혼을 해칠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계명을 가르치셨습니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 하나님께서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마음이 아니라 우리의 전심(whole heart)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직 길로만 진정으로 부요해질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진정으로 부요할 있습니다. 그리고 부요함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방인과 같이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염려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나는 아버지가 없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염려할 , 우리는 먼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를 염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염려할 , 우리는 그것을 구하기를 멈추고, 우리의 마음 속을 살펴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봐야 합니다. 모든 염려와 불안의 때에, 우리는 같은 자기 성찰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줄을 아시느니라!” 얼마나 위로가 되는 진리의 말씀입니까? 천부 하나님 안에서 우리 각자는 나뉘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고상한 마음을 갖고 왕자요 공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