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예수님께 나아온 두 사람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52

마리아, 에스더야!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고 있구나.
늘 건강하길 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나아온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지.

오늘은 그 중에서
특별히 두 사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마가복음 1:40-45절에 기록된 한 문둥병자와
마가복음 9:14-27절에 기록된 사람으로
이 사람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비란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위해
병을 치료해 주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결코 빈 손으로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단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가복음 1:40절에 보면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한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문둥병이 떠나가고 깨끗하게 되었다.

마가복음 9:22절에서는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한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겠지?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치실 수 있음을 믿었다.
"주님은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문둥병은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단다.
하지만 이 문둥병자의 믿음의 생각에 따르면
그의 병은 "전능하신" 예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원하시면 (if you are willing)"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기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뜻"이 문제다.

문둥병자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또한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하시도록 그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원하시면(if you are willing)"이라 하지 않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if you can do anything)"이라고 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즉시 그의 말을 고쳐주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는 자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매우 예민하신 것 같다.
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될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다시 문둥병자로 돌아가 보자.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와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만일 "원하지 않는다" 하셨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문둥병자가 정말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돌아가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예수님은 왜 내가 깨끗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걸까?"

여전히 문둥병자가 고민하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다.
"왜 예수님께서 날 고쳐주시지 않지?" 또는
"도대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게 뭘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이다.

만일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했다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아 예수님께서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없나보다!"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병 나을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전능하시다.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든
아니면 문둥병에 걸린 채 그대로 두시든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뜻"에 관한 문제다.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가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보든지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졸졸 따라다니든지
소망을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먼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큰 부자"로 비유할 수 있다.
그 부자가 아주 조그마한 집에서 산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가 "돈이 없어서" 작은 집에 산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왜 저런 부자가 작은 집에서 살까?" 궁금해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부자의 "뜻"이 궁금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작은 집에 산다면?
그 사람이 무슨 뜻으로 작은 집에서 사는지 궁금할게 없지.
가난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겠지 할 것이다.
(설사 특별한 뜻이 있더라도 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했다.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마가복음 15:30-3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 고통을 묵묵히 참고 감당하고 계실 때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실 것이라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고통하는 그 아들을 그렇게 내버려둘 것이라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악한 종교지도자들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던 여인들도
십자가 앞에서 다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주님! 제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능력을 보여 주세요!!!"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하신 기도를 기억하지?
마가복음 14:36절 말씀이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된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도, 빌라도도, 로마 군병도 아니다.
사단도 아니다 (사단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길 원했을 것이다).

모든 것 중에 최고는 "아버지의 원대로"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 그 뜻에 순종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하나님은 "주(Lord)"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보다 위에 계시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원대로" 다스리신단다.

문둥병자의 문둥병도
귀신들린 아이의 생명도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도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아래 있단다.
그들의 운명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주께서 원하시면" 이런 말을 할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귀신 때문에 괴로워하며
거꾸러져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경련을 일으키니
당장 죽을 것 같은 아들을 앞에 두고
마음이 몹시 절박(desperate)하겠지.
하나님의 뜻을 살핀다든가
주님의 뜻에 아들을 맡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한시바삐 귀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급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 상황에도 질서를 세우신다.
그 아버지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아들을 맡기도록 도우신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 다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루시는 법이 없으시다.
항상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에 있다.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40일 굶고 나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나요?"

정말 그렇지 않을까?
죽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이 무슨 소용인가?

다시 같은 얘기다.
하나님의 뜻이 "죽음"보다 먼저다.
그리고 죽음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죽음이 생명을 삼키지 못한다.
설사 죽었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이다.

누가복음 12:6,7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신단다.
그 자녀들에 대해서는 머리털의 숫자까지도 알고 계신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선하신 뜻"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경외함으로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마리아, 에스더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기를 원하신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다.

하지만 이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이다.

세상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
질병, 귀신, 죽음, 실패, 수치, 가난, 외로움, ...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상상해 보거라)

이 모든 것들보다 더 강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문제들을 이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란다.

마리아, 에스더야!

항상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거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찾아라.

하나님의 뜻과 너희의 뜻이 다르면
예수님처럼 기도하거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기 힘들거든
너희 원하는 것을 담대하게 구하거라.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단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해하시고 들으실 것이다.

사랑한다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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