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담대한 기도 (창세기 18:20-3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4. 8. 21. 20:53

담대한 기도

 

창세기 18:20-33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사실상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진지하게 드리는, 첫 번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점에서 기도의 모델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담대한 기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심히 중한 죄를 인하여 이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기도한 것입니다. 23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까이 나아갔다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께 다가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까이 나아갔다는 말씀은 다시 말하면 주의를 끌었다또는 끌어들였다는 말입니다. 비유로 서로 붙들고 싸우는 두 명의 레슬링 선수들을 들 수 있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면, 떨어져 있던 레슬러들은 서로를 향해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고 둘 만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고서는 레슬링이 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우스운 모양이 됩니다. 둘이 착 달라붙어있어야 싸움이 됩니다.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주의를 끌지 않고서는, 그리고 하나님을 내 마음 속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혼자 중얼거리며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을 볼 수 없던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렀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의 삶 속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주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까이 나아갔다는 의미입니다. 담대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이 주님의 임재하심을 붙들고, 주님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또한 겸손한 기도입니다. 2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가리켜 티끌과 같은 나라고 부릅니다. 원문에는 먼지와 재 같은 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들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 앞에 먼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겸손이란 이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겸손은 아브라함의 말처럼 먼지 같은 나라도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먼지와 같은 존재인데 제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께 고하겠습니까? 저는 그냥 입다물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전히 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겸손의 사람은 내가 먼지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은 겸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 지붕 아래 모실 자격조차 없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주님께 자신의 병든 종을 낫게 해주시도록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나의 먼지 같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담대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담대히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그가 하나님을 잘 알았다는 것입니다. 23-25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겠습니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며, 세상에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담대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의 담대함과 자신감의 뿌리는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기도에서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씨름해야 하는 상대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주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있습니까?” 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1 5 14,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버지께 구한 그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지식이 아니고, “아버지께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때 우리가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혹시 성 안에 남았을지도 모르는 의인들을 들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의인이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14절에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약속하셨습니다. 16:23절에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우리의 기도의 담대함의 뿌리는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 뿌리는 예수님의 의로운 이름에 있고, 또 그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담대한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입니다. 담대한 기도는 나를 낮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담대한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 또한 예술입니다. 우리 각자가 기도에 능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