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 (마가복음 12:41-44)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4. 12. 3. 17:35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

 

마가복음 12:41-44

 

오늘 말씀은 생활비 전부를 넣은 한 과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있는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셨습니다. 연보 궤는 헌금을 드리는 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는 동안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액수의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는 두 렙돈 또는 한 고드란트라는 액수의 돈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적은 액수의 돈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치면 겨우 몇 백 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돈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적은 헌금을 이렇게 높이 칭찬하시는 것입니까?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과부에게 있어서 이 두 렙돈은 그녀가 갖고 있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에게 궁금한 것은 이 과부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에서 이렇게 헌금을 한 것일까? 저라면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액수가 너무 적습니다. 과부에 앞서서 여러 명의 부자들이 이미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습니다. 이렇게 큰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볼 때, 과부는 자신의 두 렙돈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또 그 적은 돈을 헌금하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비록 적은 돈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중요한 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렙돈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릴 빵을 사야 하는 돈일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자녀들이 있다면 더욱 절실했을 돈입니다. 혹자는 이 과부의 헌금을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헌금이냐?” 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렇듯 이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생활비 전부를 연보 궤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줄 때 두 가지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를 주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풍족한 중에주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쓸 것이 충분히 많았습니다. 거기서 얼마간을 떼어낸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를 위해 많이 남겨두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희생이라고 할 수 없거나 미미한 희생일 뿐입니다. 부자인 그들은 를 다치지 않으면서 내가 가진 것을 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헌금을 통해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상으로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희생은커녕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줍니다.

 

하지만 이 과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녀에게 두 렙돈은 그녀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생활비였습니다. 곧 그녀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돈이 없어서 먹을 것을 살 수 없다면 그녀는 굶을 수 밖에 없으며, 심하게 말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렙돈은 그녀의 생명이며 자신의 일부였습니다. 이 두 렙돈을 헌금한다는 것은 곧 그런 자신을 도려내어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여간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그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는 곧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산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 일부가 아니라, “우리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천국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44절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이를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그 밭을 샀습니다. 45-46절의 좋은 진주의 비유에서도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난 장사가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말씀들에서는 그 보화나 진주의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이들이 얼만큼의 소유를 갖고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하는 것은 이 보화와 진주가 매우 값진 것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은 곧 그 보화와 진주의 절대적인 가치를 말해줍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소유가 얼마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소유의 전부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생업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전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몸과 마음을 함께 드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매우 자유롭고 즐겁게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는 것이 어려운 것은 를 주지 않고 내가 가진 것만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나를 희생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는 것은 많은 아픔을 동반합니다. 내가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주고 싶지 않은데 주어야 하는 데서 오는 아픔입니다. 우리는 줄 때, “내가 가진 것을 주기에 앞서 를 먼저 주어야 합니다. 이 과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런 그녀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팔이나 다리를 하나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셔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 히브리서 8:3절에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하시고, 9:11-12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심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살과 피를 드리심은 물론이며, 그 영혼이 누릴만한 어떤 위로나 평안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제사입니다. “전부를 넣었느니라칭찬하시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도 같은 것은 원하십니다. 로마서 1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제사는 내가 가진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제사는 바로 로 드리는 것입니다. “를 희생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이 과부를 통해서 참 제사의 의미를 깨닫고 또 행하는 저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