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신앙의 중심 (마가복음 2:18-2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5. 7. 11. 13:11

신앙의 중심

 

마가복음 2:18-20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명확히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아무튼 그것이 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는 행하고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냥 교회를 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는 그것들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삶의 열매가 매우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금식에 관한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따로 금식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이 질문은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금식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8:12절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 서서 도도하게 기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를 보면 당시 경건한 신앙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왜 그가 금식을 했는지를 말해줍니다. 18:9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자기를 의롭다 믿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그가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근거는 금식과 십일조였습니다. 그가 금식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의 의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를 의지하여 죄인들을 멸시하며, 하나님 앞에 꼿꼿이 서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가 금식하는 이유는 자기 의이며 자기 영광이었습니다. 그의 신앙 생활의 중심에는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자기 영광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대해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마태복음 6:16a).

 

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예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버리십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마치 금띠처럼 머리에 두르고 다니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치듯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랑그리고 신랑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의 중심에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행할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함께 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신앙 생활의 중심입니다.

 

마가복음 3:14,15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첫 부분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장 큰 목적은 그들로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다른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함도 아니고, 또 일시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목적은 영원한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을 주님의 집에 초대하시고 그곳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1: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소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 바울의 욕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욕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보다 이 욕망이 이루어지길 바랬습니다. 이 소망이야말로 산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바로 그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혼인 잔치를 즐길 때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할 때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대한 참된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욕망이며 그 욕망이 제자들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만일 슬퍼한다면 그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거나, 예수님이 아닌 다른 욕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선배가 있습니다. 이 선배는 손님을 집에 초대하면 맞이하는 순간부터 떠나 보내는 순간까지 즐거워합니다. 먹을 것을 준비하겠다고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고 계속 손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미리 다 준비를 해 놓고). 손님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많은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 같이 숫기가 없고 말이 없는 사람도 그 집에 가면 마치 이 된 듯하며 말이 많아집니다. 무엇보다도 손님인 저를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만약 그분이 사흘 굶은 표정으로 저를 맞이한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들이 많아도 저로서는 전혀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금식하라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금식합니다. 금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겸손히 행함으로 주님을 찾는 나의 간절한 마음(욕구)”를 주님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랑을 빼앗겼을 때 하는 금식과 신랑과 함께 있을 때의 잔치는 실상 같은 마음 곧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웃고 예수님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신앙의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늘 살아 계신 예수님이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몸부림이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꿈꾸는 욕망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신앙은 사실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을 의식한 연극에 불과합니다. 물론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 보이시지 않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삽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싸움입니다. 곧 내 신앙의 중심에 늘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서 보좌에 좌정케 하시며, 이 주님을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함께 하심을 인하여 기뻐 춤추며, 내 죄로 인해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 회개하고 울며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날마다 더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며, 더 깊이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진정으로 주님께 드려지며 주님을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