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악한 마음
마가복음 3:1-6
성경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경의 요약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3:16절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질병과 같은 육체적 문제, 죄나 귀신들림 같은 영혼의 문제, 가난과 같은 경제적 문제, 불의와 같은 사회적 문제, 전쟁과 같은 국가적 문제,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 재해들, 죽음이나 심판과 같은 영원의 문제 등 정말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문제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해 주십니다. 문제가 어려운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하나님께선 전능하십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 “너무 어려운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좀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신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문제야 말로 성경 전체가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성경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긴 역사가 오직 이 한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생기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면서 어려운 문제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말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stubborn heart)”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3장 5절 말씀 앞부분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어떤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이 예수님을 근심케 그리고 노하시게 했습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들으려 하지 않는 마음,” “배우려 하지 않는 마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시고자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결코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또 이 질문은 그들의 비뚤어진 마음을 드러내고 고쳐주는 진리의 빛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이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옳지 않음이 불을 보듯 분명하지만, 그냥 계속해서 악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이들은 더욱 악해져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말 이들의 “완악한 마음”은 차돌(flint)보다 더 단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완악함을 예수님조차 어쩌실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는 그 약이 몸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아픈 부위까지 도달하여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몸에 그 약을 받아들이는 장치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배설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약도 중요하지만 그 약을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약의 효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완악한 마음”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완악한 마음”이란 곧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완악한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질병이며, 죄로 치면 가장 고질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마음을 완악하게 할까요? “마음의 완악함”이 꼭 의도적으로 비뚤어진 마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6:52절 말씀은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둔한 마음”은 오늘 본문의 “완악한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것은 두려움과 불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죄의 유혹 (deceitfulness of sin)”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3: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죄의 유혹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 마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죄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손이 마른 불쌍한 사람”에 대한 긍휼함도, “진리와 사랑의 주님”께 대한 경외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무자비한 살인심만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이들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욱 독하여졌습니다.
성경은 “완악한 마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사야서 6:10절에는 “둔한 마음”이라고 하고, 시편 119:70절에는 “지방같이 살찐 마음”이라고 하고, 에스겔서 36:26절에는 “굳은 마음(heart of stone)”이라 하고, 심지어 스라갸서 7:12절에는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이 심하게 무디어져서 감각이 전혀 없고, 또 심하게 딱딱하게 되어서 부드러워질 소망이 전혀 없음을 말해줍니다. 느끼고 감동하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마음이 “금강석”과 같이 딱딱하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완악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습니다. 이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딱딱함”이 더해질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동화가 있습니다. “청개구리” 이야기입니다.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 개구리의 말을 듣지 않고 늘 반대로 했습니다. 이런 아들 때문에 엄마 개구리는 속이 썩어 병이 들고 마침내 죽게 되었습니다. 늘 반대로만 하는 아들이 못미더웠던 엄마 개구리는 청개구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내가 죽거든 산에 묻지 말고 물가에 묻거라!” 그렇게 하면 자신의 시신을 산에 묻어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예상과는 달리, 엄마의 죽음을 본 청개구리는 그 동안 자신이 엄마에게 저지른 많은 잘못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뉘우치고 마침내 평생 처음으로 엄마의 말에 순종하여 엄마를 물가에 묻었습니다. 아들 청개구리의 “완악한 마음”을 움직인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엄마의 죽음”이었습니다. 엄마의 죽음은 아들 청개구리의 “완악한 마음”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아들 청개구리는 비로소 “죄의 유혹(the deceitfulness of sin)”에서 깨어나 “죄의 실상(the reality of sin)”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감각”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엄마 개구리의 그 동안의 섬김에 감사하며, 엄마의 말들을 기억하고 듣는 지각이 생긴 것입니다. 참된 사람 아니 개구리가 된 것입니다.
“엄마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예수님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우리의 완악하고 죄악된 마음의 실상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금강석” 같이 딱딱한 마음을 깨뜨리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의 유혹으로 인해, 불신과 두려움으로 인해 딱딱해지고 감각을 잃었을 때, 이를 부드럽게 하고 감각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사람들이 그 죄를 깨닫지 못하도록 더 강한 유혹으로 마음을 마비시킵니다.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며 더 완악하게 만듭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내 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우리 죄의 “민 낯”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금강석” 같은 마음을 깨뜨리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들보들한 마음”을 갖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 마음 곧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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