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히브리서 5:7-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5. 7. 2. 00:59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히브리서 5:7-10

 

히브리서에는 온전하다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7:19절에는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하고 9:9절에는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합니다. 2:10절에는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하고, 7:28에는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온전하신 분이시며, 또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분이시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하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온전하게 되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본래부터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본문들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온전하심은 예수님께서 본래 가지신 그 온전하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이루신온전하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태였으며, 어떻게 온전하게 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를 말합니다. “육체에 계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에 계신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육체는 약합니다. 마태복음 26:41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육체는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육체가 약하여 말을 듣지 않습니다. 둘째, 육체는 악합니다. 로마서 영어 성경(NIV)에는 여러 군데 육체“sinful nature” 죄악된 본성이라고 번역합니다. 로마서 7: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육신 곧 육체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조금 덜 착하다는 말이 아니라, “전혀 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도모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육체로만 놓고 보면, “는 순전히 약하고 순전히 악한 존재입니다. “온전함과는 아주 거리가 많습니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육체에는 온전함의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육체에 계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육체는 약하고 악합니다. 그래서 쉽게 시험에 빠집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이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험을 이기시고 온전하게 되신 것입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믿는 기도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와 경외하는 순종은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엄마의 몸과 연결시켜주는 탯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탯줄을 통해서 양분과 산소가 공급되고 또 탯줄을 통해서 모든 불순물들이 빠져나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필요한 것을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으며, 예수님의 심령에 고인 모든 고민의 눈물들을 하나님 앞에만 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시면서 견뎌야 하는 시험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40일을 굶고 나서 눈 앞에 있는 떡을 먹지 못하는 고통과 같았습니다. 면전에서 악을 행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에게 화도 내지 못하는 고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온전함의 의미를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곧 내가 온전해야 온전한 것입니다. 내가 건강하고, 지혜롭고, 부유하고, 착하고 게다가 예쁘거나 잘생기고 성격까지 좋다면 정말 흠잡을 데가 없겠습니다. 속말로 엄친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온전하심은 자신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삶은 온전함과 매우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심은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온전히의지하시며, 하나님께 온전히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곧 죄가 전혀 없으신 삶을 사셨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온전하심을 저가 육체에 계실 때약하실 때에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내가 온전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형편이 좀 나아져야 하나님 말씀도 순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형편이 나아진 가운데 드리는 순종은 사실은 순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적선을 하는 것은 크게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오직 궁핍함 중에 드려야 우리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로 온전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같이 낮아졌을 때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참된 의미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약할 때 그때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세워나가는 기회입니다.

 

9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의 순종과 이를 통해 온전케 되심은 사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찬양집회에 참석하거나, 머리를 풀고 통성기도를 하거나, 정기적인 금식 기도를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모방하며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약하고 심지어 악할지라도 주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온전함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에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