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재판장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9:1-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5. 1. 3. 12:25

재판장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9:1-16

 

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인 1-16절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넘겨집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군병들의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은 피에 주린 이리처럼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재판관인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조용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힘들(powers)이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도 있었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는 민중의 힘(people’s power)도 볼 수 있습니다. 성난 군중들은 이유도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들의 위세는 권력자인 빌라도를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렇게 사나운 사람들의 함성 뒤에는 이들을 움직이는 종교 권력(religious power)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고 또 사람들을 교묘하게 충동질하였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는 로마 황제 가이사(Caesar)의 권세도 나옵니다. 당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는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였던 로마 제국 안에서도 가장 강력한 황제였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세력들이 무서운 긴장감 속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충돌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예수님은 전혀 힘이 없는 불쌍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총독의 통치권, 민중의 힘, 종교지도자들의 영향력, 그리고 로마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과 함께 또 하나의 (power)”이 오늘 말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10절에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예수님께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 줄 권세가 있다고 뽐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란 곧 하나님이십니다. 빌라도가 가진 권세는 가이사가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또한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며 인간나라를 다스리사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분이십니다 (다니엘 4:32).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 또한 가이사를 두려워하는 대신, 그리고 성난 군중들과 간교하게 협박하는 대제사장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하여 빌라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은 곧 대제사장들을 말합니다. 그 뒤에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있고, 그 뒤에는 마귀 사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에는 “guilty of a greater sin”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재판관의 판결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넘긴 자들의 죄를 유죄로 판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공의를 저버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빌라도에 대해서도 그의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피고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위엄으로 죄인들을 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는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오묘한 섭리를 신묘막측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상 권력들의 충돌과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함께 어우러져, 주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던 세상 구원의 역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들을 다 통찰하시고, 재판관의 위엄과 권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막강한 권한을 쥐고도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빌라도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임을 알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눈 앞에 참을 수 없이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동일한 위엄과 진리로 세상과 사람들을 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장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의 권세자들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늘 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권세자들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의 죄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죄들을 재판하십니다.

 

또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당장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을까?” 마태복음 12:19-20절은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예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집행하시는 재판관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공의는 죄인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무서운 공의가 아니라,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고 의로 이끌어가시는 사랑의 공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빌라도도 종교 지도자들도 끄지 않으시고 그들과 다투지도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시고,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용서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받고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로마서 3: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실 필요도 증명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냥 심판하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화해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인 됨도,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 곧 의로우심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는 구원 역사의 섭리는 너무나도 신비하고 오묘해서 그 깊이를 다 헤아리기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주님은 심판하여 이기시는 재판관이십니다. 동시에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는 재판관이십니다. 이 주님 안에서 우리도 세상을 이기며 동시에 섬기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