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54

마리아, 에스더야!

오늘 공부할 내용은
누가복음 18:9-14절 말씀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라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0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롭다고 생각했다.
영어로 보면 "confident of their own righteousness"라고 되어 있다.
곧 "자신의 의"를 믿었다는 말이다.

"의" 또는 "의롭다"는 말이 무엇이지?
전에도 몇번 말한 것처럼
쉽게 말하면 "옳다"는 말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의 (righteousness)"는 사실 매우 중요하단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모든 것의 "기초(foundation)"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을 떠나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보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험을 쳐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고 하자.
그런데 시험 도중 딱 한번 컨닝(cheating)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합격이 취소될 것이다.

설사 그가 시험을 위해서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실력도 갖추었고
또 대부분의 문제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풀었다고 하더라도
단 한번의 잘못으로 그는 "의(righteousness)"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가 그동안 했던 모든 노력들
그리고 그 결과로 얻은 합격의 영광
그리고 이를 기초로 미래에 약속된 모든 행복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기초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시험(examination)은 일종의 심판(judgment)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입시나 다른 시험들은 혹시 실패하더라도 다시 기회가 있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볼 수 없는
오직 한번 밖에 기회가 없는
그리고 그 결과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시험이 있단다.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는
글쎄 아빠도 성경을 더 깊이 읽어봐야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험(examination)을 통해 합격자들과 불합격자들이 나누어지듯이
장차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나누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5:29절에서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신다.

또 마태복음 25:32,33절에서는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신다.

이와 같이 장차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지금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나누시는데
그 나누시는 기준이 바로 "의 (righteousness)"이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옳으면 (righteous) 영생을
옳지 않으면 (unrighteous) 영벌을 선고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는 "생명"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과 노력들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기초"인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앞에서 본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에는 관심이 없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또 이에 대해 자신하며 자랑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멸시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바리새인과 한 세리가 성전에 서서 기도를 한다.
그런데 둘이 서로 다른 것은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랑하며
세리는 "자기 죄"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이 바리새인은 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을까?

첫째는 자기가 한 일들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도 하고
또 수입의 10분의 1을 십일조로 드렸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도둑질 하는 사람들
나쁜 짓 하는 사람들
간음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기 서 있는 세리
이런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단다.

이런 바리새인과는 달리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자기에게 아무런 "의"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다.

이 세리와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하신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being justified)"는 뜻이 무엇이지?
그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죄가 없으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인 세리"가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 세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그가 어떤 좋은 일을 했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착해서 주신 것이 아니고
그냥 "은혜"로 주셨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의"가 전혀 없었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가 없는 죄인임을 인정했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의롭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의 뜻이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다고 볼 수도 있겠지.
바리새인은 (비록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의롭게 살고자 노력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단지 회개했다는 이유로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리를 더 축복해 주시니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착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이 비유에 나온
바리새인은 무엇이 문제일까?
그는 자기의 "착한 일들"을 "의"로 여겼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자기가 한 일들을 기초로
또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는 옳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법정(court)에
판결을 내리는 판사님이 계신데
재판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 "나는 무죄다"라고 선고하는 것과 같다.
아마도 판사는 그에게 더욱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의 수준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로마서 3:23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은 한 마디로 "perfect"하단다.
너무나 거룩하고 눈이 부셔서
천사들도 눈을 가려야 할 정도란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는 달리
"사람들의 의"란 참으로 초라하다.
이사야서 64:6절 말씀에서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한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자랑하는 의의 옷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누더기(filthy rags)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고
거룩하신 재판장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자기의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이를 자랑하고 있다.

반대로 세리는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 둘 중 누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인지
쉽게 알 수 있겠지!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복이 있다고 하신다.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약속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부끄러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셨을까?

다음은 로마서 3:21,22절 말씀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한 의(a righteousness from God)"가 나타났다.
이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옷은 아주 거룩하고 순결한 옷이다.
그래서 우리의 부끄러운 죄들을 가릴 수 있다.

위의 말씀에서 보면 이 "의"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다.
셋째,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온다.

이 말씀들은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의 (my own righteousness)"가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 나온 바리새인은
"confident of his own righteousness"라고 했지.
그리고 그의 의가
"자신이 한 일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온다고 했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기 의"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이 "의의 옷"을 만드실 때
우리가 아무런 도움을 드린 것이 없단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혼자 만드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의"를 주신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성경에 기록된 것들을
"아멘"하고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우리가 그 진리 안에 거하게 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임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별이 없이 주신다.
곧 바리새인이든 세리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유식한 자든 무식한 자든 차별하지 않는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보여준다.

이 의는 내가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로마서 3:2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사람들은 자주 "의"를 보여주거나 자랑하려고 한단다.
마태복음 6: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계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외식하는 자들(hypocrites)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하거나
기도할 때 붐비는 큰 길 모퉁이에 서서 하거나
금식을 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혹이 있단다.

마리아, 에스더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라고 주신 "장식품"이 아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예복"이며
사단 마귀와 싸우기 위한 "갑옷"이다.

마리아, 에스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의미를 알고
이를 생명처럼 누리기를
아빠가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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