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하나님께 부요한 자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56

마리아, 에스더야!

오늘 에스더와 성경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린다.

제목은 "하나님께 부요한 자"이고
공부한 성경 본문은
누가복음 12장 16-21절 말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단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NIV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The Parable of the Rich Fool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였다.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신다.
왜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까?

이는 그가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치 못한 자
곧 "가난한 자"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항상 말하듯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란다.

그리고 바람직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늘 말씀에서 표현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rich toward God"이라고 써 놓았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자"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처럼
소유가 많아서 쌓아둘 곳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 또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또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표현하신 것처럼
정말 행복해 보이지 않니?
여러 해 동안 걱정 없이
편하게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다 꿈꾸는 삶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단다.
바로 그의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는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지만
자신의 영혼의 소유할 수 없단다.
그의 생명의 소유자는 바로 하나님이시지.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 된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부자는
하나님께 부요한 (rich toward God) 자이다.
"하나님께 부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에스더가 말했지?
한국에 계신 외할머니와 통화를 할 때면
서먹해서 할 말이 없다고...
할머니를 본 지가 벌써 7-8년이나 됐으니 당연하지.

반면에 외할머니집 근처에 사는 사촌 효제는
할머니랑 친구처럼 지낸다지.
매일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와 함께 먹고 놀고 하니까.
에스더는 이런 효제가 조금 부러울꺼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경우에
효제는 "rich toward 할머니"라고 할 수 있고
에스더는 "not so rich toward 할머니"라고 할 수 있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친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을까?
또는 "rich toward God"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할까?
그것도 물론 중요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효제는 외할머니와 친한데
에스더는 외할머니와 서먹하지.
그러면 외할머니가 에스더를 "덜" 사랑하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효제와 에스더를 똑 같이 사랑하신다.
오히려 에스더를 더 사랑하시고
더 보고 싶어 하실 수도 있지.
오랫동안 보지 못하시고
가까이서 사랑해 주지 못하셨으니까.

효제가 할머니 집에 가면 "왔냐!" 하고 맞으시겠지만
에스더가 오랫만에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는 아마 맨발로 뛰어나와
에스더 얼굴을 감싸안고
뽀뽀를 하시며
엉엉 우실 것이다.
아빠는 안 봐도 알 수 있지.

그러니 사실은
에스더가 생각하는 것처럼
할머니와 에스더 사이가 "서먹한" 것이 전혀 아니란다.
다만 에스더가 할머니의 사랑을 잘 모를 뿐이다.

이것이 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자주 있는 문제란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알지!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지.
착하고 말 잘 듣는 첫째 아들, 그리고
말썽꾸러기 둘째 아들.

둘 중에 누가 더 "rich toward the father"일까?
물론 첫째 아들이겠지?
그런데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큰 잔치를 연 것을 안 큰 아들은
누가복음 15:2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NIV 영어 성경에는 "아버지를 섬겨"라는 말을
"slave for you"라고 써 놓았다.
다시 말해서 "종처럼 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열심히 일했는데도
친구들과 함께 "염소 새끼" 한마리도 즐긴 적이 없단다.

이 아들은 "부자 아버지"를 두었지만
"가난한 종"처럼 산 것이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았다.
돌아온 동생도 밉고
그를 환영해주는 아빠도 미웠다.
참 불쌍하지 않니?

그런데 이런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5:31).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My son, you are always with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

실상 첫째 아들은 "큰 부자"란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또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들이 다 그의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가난한 종"으로 불행하게 살았을까?
이는 그가 아버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을 위해 "종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잘 알고
이를 자유롭고 즐겁게 누리는 것이다.

에베소서 3:18,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높은지 알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단다.
하나님이 것이 다 내 것이 된단다.

마리아, 에스더야!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녀"란다.
"너희의 눈"으로 너희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너희를 보거라.

이것이 바로 "믿음"이란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는 길이다.

사랑한다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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