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로마서 5: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4. 9. 17. 19:31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로마서 5:1-6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쓴 편지로, 기독교의 교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설명한 책입니다. 혹자는 성경 전체를 반지라고 할 때, 로마서는 그 반지의 다이아몬드 부분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구원 곧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누리는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두 부분을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았으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은 매우 중대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유로 하자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죄를 짓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죄수가 감옥 안에서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당하며 작은 실수에도 무서운 형벌을 받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이제 그곳을 나와서 임금님의 자녀가 되어서 넓고 화려한 궁궐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라는 것도, “형벌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평화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비유로 설명한 것이지만, 사실은 이것으로도 의롭다 하심의 축복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분명한 것은 의롭다 하심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식입니다. 이 표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 속에 영원히 새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들 중 가장 큰 은혜는 바로 1절 뒷부분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으로부터 우리가 얻게 되는 가장 큰 은혜는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곧 하나님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참된 구원의 의미입니다. 국어사전에 구원의 의미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어려움 또는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일까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죠. 죽음은 아마도 더 큰 두려움일 것입니다. 죽고 나서 지옥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옥 불못에서의 영원한 고통보다도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들을 누리고 하늘 꼭대기까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면 그 많은 소유와 영광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는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진노의 재판장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품 안에서 화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천지가 개벽하고, 지옥이 천국으로 변하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은혜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서있는 곳은 율법과 정죄의 세계가 아니고, 은혜의 세계 곧 용서와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는 두 얼굴이 있습니다. 한 얼굴은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시는 은혜의 얼굴이며, 다른 한 얼굴은 법대로 엄하게 하시는 율법의 얼굴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들과 탕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간 둘째 아들은 그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아버지는 이 아들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고,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즐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입니다. 이후 아버지를 볼 때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께 범했던 무거운 죄와, 또 그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신 아버지의 은혜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아들로 살았지만, 그가 누리는 모든 축복이 다 아버지의 은혜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감사했습니다. 아마도, 둘째 아들 자신이 또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은혜의 세계에 산다면, 첫째 아들은 율법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그를 법대로 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 자신이 아버지를 그렇게 보고, 이로 인해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께 따져 물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있었나요?”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하나 마음 놓고 즐기지 못했습니다. 그가 착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은혜의 자식이 아니라 율법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혜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법대로살았습니다. “명을 어김이 없이살았습니다. 그의 속에는 형벌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보면 무서웠습니다. 친구들과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들이었지만 마치 종처럼,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법대로그리고 자기 의를 의지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법대로사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살 때, 우리가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누리며 우리 자신이 또한 은혜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 받는 은혜는 또한 소망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우리에게 소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과 소망이 없는 사람의 삶은 정 반대의 삶을 삽니다. 고린도전서 1532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없을 때의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이와는 반대로 로마서 8:18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가진 우리들의 소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하며 절망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미래의 소망을 가진 자는 현재의 고난을 능히 견딜 뿐 아니라 심지어 이를 즐기기까지 합니다. 이는 그 고난이 가져다 줄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옮겨놓는,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령한 복들을 쏟아 붓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매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