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메시지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4. 10. 15. 21:23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1-6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의 가버나움과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며,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향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나사렛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을 방문하신 목적은 바쁘고 힘든 사역을 하시다가 고향 사람들과 함께 잠깐 쉬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동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믿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향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며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 이들의 반응을 볼 때,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사신 삶은 놀라운 에피소드가 없이 대체로 평범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씀과 그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의 역사들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이러한 질문들은 어처구니 없는 결론으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이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그들 중 하나인 평범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등으로 부르며 폄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지혜의 말씀과 그 행하신 기적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고집하며 심지어 그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을 들어 저들의 행위를 이해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다시 말해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자기 친척들 사이에서, 그리고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이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예수,” “내게 익숙한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혜의 말씀을 하시고 이적을 베푸셔도, 이들은 이 예수님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고집했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교만하여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세계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예수를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과 권능의 역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예수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 예수의 고향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께서 방문하셔도, 새로운 지혜의 말씀을 하셔도, 새로운 일들을 행하셔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만을 고집합니다. 별로 새로운 것도 없고, 배우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배척한 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 아무런 권능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히 여기신 사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백부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쓰러져 몹시 괴로워하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하시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백부장은 선진 로마 제국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하인의 불치병이라도 아주 쉽게 고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기이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로마인 백부장이 어떻게 예수님께 대해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께 대해 들은 그대로,” “본 그대로믿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화려한 집이 마구간 같이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또 주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을 볼 때, 자신의 하인을 고치시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은 아주 쉽게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그냥 서서 말씀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이 예수님을 놀라시게 할 만큼 기이한 것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믿지 않음도 예수님께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아무 일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마을을 방문하셨지만,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고향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축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축복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로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그 믿음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이 커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늘 예수님을 보고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하고 놀라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깊고 넓고 높은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도 함께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편안하고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조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생각하면,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흥분해야 합니다. 조바심이 나고 긴장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 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가 평생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도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믿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주 옛날 옛적에 받았던 은혜를 가물가물 기억하며 겨우 믿음을 이어간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그 어린 아이가 자라지 않고 계속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슬픈 일입니다. 이와 같이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믿음도 하나님께서 어여삐 보시고 받으시며 축복하시지만, 계속 겨자씨 한 알로 남아 있으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앎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 예수님을 슬프시게 하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